시작하기에 앞서
오래 전부터 '언젠가는 꼭 해야지' 라며 다짐만 하며 미뤄왔던 일을 이제 시작한다. 무슨 일인가 하면? 우리(혜경과 종진)가 만들어 온 여정을 기록하는 일이다.
북살롱 오티움에서 열린 북토크에서 편성준 작가의 이야기를 들었다. 북토크의 메인 주제와는 달리, 나는 편성준 작가와 그의 배우자인 윤혜자님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있다.
북토크를 들으며, 우리 부부의 이야기를 주변에 알려야겠다는 필요성을 느꼈다. 아래 이미지에는 우리(혜경과 종진) 이야기의 간략한 버전이 적혀있다. 오티움 주인장님을 비롯하여 몇몇 분들이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하셨다.

간략히 소개하자면
배우자와 나는 코로나 사태 이전까지 하이브아레나(Hive Arena)라고 불렸던 코리빙 스페이스를 운영했다. 2018년 당시 외국인들에게는 친숙하지 않은 신길동에서 실리콘밸리/유럽의 대도시에서 온 외국인 개발자/디자이너들과 2년 넘게 함께 살았다. 함께 살던 공간에서 우리 부부의 아이도 태어났고, 우리는 외국인 친구들과 멋진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우리는 그 커뮤니티를 Hive Food Gang이라고 부른다. 코리빙 이전에는 선정릉역 근처에서 같은 이름으로 코워킹 스페이스를 운영했다. 포브스에서 아시아를 대표하는 11개의 코워킹 스페이스 중 하나로 꼽혔다.
안타깝게도 부동산 관련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용산 재개발'이라는 부동산 개발 호재가 있었고, 소유주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집을 처분하길 원했다. 우리가 살고 있던 지역의 부동산 거래가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 부동산 계약이 1년 정도 남아있었지만, 소유주, 부동산중개인, 잠재적 매수자 등 관련된 모두가 변화를 원했다. 어쩔 수 없이 일찍 나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이사한 다음 날부터 건물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 자리는 빌라가 대신하게 되었다. 우리의 코리빙 챕터는 아쉽게 막을 내렸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코리빙을 운영했다. 하지만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는지 원망스러웠다. 서울시가 용산 재개발이라는 도시 계획을 발표함으로써 부동산 개발 광풍이 불었고, 그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몸과 마음이 지쳤다.
코로나 이후 많은 외국인들이 K-드라마, 영화, 음악 등에 관심을 갖고 서울을 방문하지만, 우리가 운영할 당시에는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원격근무자들을 보기 힘들었다. 트위터나 슬랙 커뮤니티 등에서 서울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표하는 외국인 개발자 친구들이 보이면 직접 대화를 걸어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단 한 번도 아시아를 방문한 적이 없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설득하여 만든 비즈니스였다.
서울시 부동산 개발 계획이라는 외부 요소 때문에 비즈니스를 멈춰야 하니 허탈했다. 당시 아이가 갓 돌이 지난 시점이라 불안하고 답답한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6개월 정도 지나자 코로나 바이러스가 등장했다. 많은 시설들이 폐쇄되고, 외국인들은 자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비즈니스를 지속할 수 있었을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운이 좋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가 거둔 성과
우리는 코리빙 스페이스를 운영하며, 다양성(Diversity)에 기반을 둔 새로운 형태의 주거 공동체를 만들었다. 우리 사회에 변화를 만들 수 있는 하나의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다. 현 시점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 50개 이상의 나라에서 찾아온 외국인들과 함께 살면서 정말 재미있었다. 정체성을 나타내는 인종/국가/종교/성 지향 등은 물론이고, 성장한 환경과 배경이 달랐다.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고, 하나의 공간에서 원만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존중하고, 상대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당시 나는 지인들에게 농담삼아 회색지대에 살고 있다고 표현했다. 집 밖은 한국 사회인데, 집 안은 글로벌 사회였다. 보편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글로벌 사회였다. 사회적 약자(여성, 어린이, 노인, 장애인 등)를 배려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친절과 배려가 몸에 배어있는 이들이 모여 살았다. 각자가 가진 배경과 차이점, 공통의 보편적 가치에 대한 생각을 나눴고, 그 일련의 과정은 우리를 정신적으로 크게 성장하도록 만들었다.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꼽자면, 저출산, 고령화, 소득 양극화, 불평등, 주거 불안정, 성별 갈등, 높은 자살률 등이 있다. 원인으로 과도한 경쟁과 능력주의(능력이 뛰어나고 노력을 더 많이 한 사람이 보상을 받아야 한다)를 이야기한다.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라며 많은 대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나는 '다양성(Diversity)의 부족 문제' 를 해결하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라고 본다.
다양성이 부족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내가 성장한 한국 사회는 획일화된 사회다.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하려면, 최대한 실패를 줄이고 성과를 거둬야 한다. 실패를 줄이는 방법은 뭘까? 다른 이들이 이미 검증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들 비슷한 방법을 시도한다. 누군가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면 인정하지 않는다. 불편해한다. 결국 타인에게도 나와 비슷한 방법으로 경쟁에 임하기를 강조한다. 요즘 시대에 말하는 '공정'이다.
남들보다 더 많은 힘과 권력을 가진 직업을 얻거나, 많은 부를 쌓기 위해 노력한다. 타인과 자신을 끝없이 비교하며, 우월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능력이 더 뛰어나고 노력을 더 많이 한 사람에게 더 많은 보상이 주어지는 능력주의가 중요하다.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개인으로부터 찾는다. 이렇다 보니 '각자가 살 길은 스스로 찾는다'는 각자도생이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 중요한 보편적 가치(자유, 평등, 정의, 연대감 등)에 대한 논의를 '나중으로' 미뤄왔다. 2016년 박근혜 탄핵 때와 같이 논의하기 좋은 기회가 있었지만 결국 다음으로 미뤘다. 그 결과 12월 3일 윤석열 내란 사태를 맞이했으며, 저출산, 소득 양극화와 불평등은 과거보다 더 심해졌다. 사회 내 갈등은 최고조에 달했으며, 자살률은 역대 최고로 높아졌다. 보편적 가치는 다양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우리의 코리빙 경험에서 보았듯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며 서로를 존중할 때, 우리는 경쟁이 아닌 연대를, 획일화가 아닌 다양성을, '각자도생'이 아닌 공존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우리 사회에 다양성이 확보된다면, 각자가 가진 가치관과 정체성을 존중하고 인정하며 받아들일 수 있다면, 지금과 같이 각자도생, 능력주의로 인정받는 사회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