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 없이 빈둥거리기
아침 8시 25분, 주중 하루의 가장 중요한 업무인 아이의 등교 함께 하기를 위해 집을 나선다.
언제부터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수십년 전 어쩌면 막내 동생이 태어난 그날부터 몸을 조일줄만 알았지, 몸에 힘빼는 법을 모르고 지냈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맘먹고, 빈둥거려보기로 한다.
'생산적인'이라는 단어를 좋아한 내가 빈둥거리기라니 쉽지 않은 연습이다. 집에서 낮잠 자는 것도 죄책감을 느끼는 나이기에.
남편과 함께 아이의 등교를 돕고, 산책 코스를 고민하다가 어제와 다른 루트를 가보기로 한다. 지도 앱을 켜고, 아이가 먹고 싶다는 '식빵'을 사기 위해 검색을 해본다.
tandir house(탄드르 하우스): 건강한 호밀빵과 합리적인 가격의 만남
'건강', '합리적인 가격'이 눈에 들어오는 빵집이다. 오늘의 목적지다. 벌써부터 틀어지는 거 같은 느낌, 뭔가 산책코스부터 생산적인 느낌이다.
사는 곳의 근처엔 공단이 있다. 공단과 멀지 않은 곳에 '4단지'라고 부르는 동네가 있는데, 중앙 아시아에서 이주하신 분들이 모여사는 곳이다. 동네 입구부터 러시아어, 우즈베크어로 된 간판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탄드르는 우즈베크어로 오븐이라는 뜻이다. 탄드르 하우스는 중앙 아시아 분들이 식사로 즐기는 빵, 삼사, 화덕에 구운 빵 등을 만들어 판다.
한번에 욕심 내지 않으려고 '클래식 화덕빵'과 '러시아 바게뜨' 2개의 빵만 집어 들었다. 도착 시간이 가게가 막 오픈한 시간이라, 김을 빼기 위해 방금 만든 빵들이 진열되기 전이다.
'얼마예요?'
'5000원이요.'
남편과 서로 쳐다보며 '그래 이거지.' 하얀 비닐 봉투에 무심히 담겨져서 건네받은 묵직한 빵 2개의 가격이다. 무게감도 부피도 파리바게뜨였다면, 15000원은 족히 넘을 거 같다.
빵집을 나오면서 비닐 봉지 속에 손을 쏘옥 넣고, 한 귀퉁이를 뜯어먹었다. 짭짜롬하니, 쫄깃하니, 깨도 씹히고, 고소하니 맛있었다. 빵을 오물거리며 '괜찮네'를 반복하며 왜 한국의 다른 빵집과 빵 가격과 이렇게 차이나는지 남편과 한참을 얘기했다. 중간 단계에서 문제가 있는게 분명하다는 결론만 대충내리고, 부스럭거리며 빵을 한 입 또 뜯어 먹었다.
돌아오는 길에 보이는 어린이집 원아 모집에도, 초등학교 앞에도 우즈베크어인지, 러시아어인지 정확히 모르지만 중앙 아시아 언어로 현수막이 걸려 있다. 이미 우리가 사는 사회의 구성원들은 빠르게 다양해지고 있는데, 여전히 많은 곳에서 다양성이 존중되지 않으니 안타깝다.
집에 도착하니, 화덕빵이 1/3만 남아 있다. 그리고 바로 러시아 바게뜨를 잘라서 한 입 베어 문다. 화덕이 아닌 오븐에서 구운 빵이라고 하셨다. 짭짤한 맛은 조금 덜하고, 화덕빵과는 다르지만, 쫀득하니 괜찮았다.

이젠 뭐하지?하고 있는데, 엄마가 중국 내수로 구입한 로봇 청소기가 작동이 안된다고 하신다. 중국어를 모르시는 엄마가 더 이상 답답하지 않게 이번엔 이 문제를 해결하리라. 와이파이가 잡히는 곳으로 가지고 가서 한국어 음성 확장팩을 설치하려고 끙끙댄다. 계정 연동이 되지 않아, 한참을 끙끙 거리다가 러시아 개발자가 만든 사이트의 도움을 받아 어찌저찌 완료.
로봇 청소기를 기특해 하시지만, 소통이 안되어서 답답하던 엄마가 이젠 로봇 청소기와 대화를 하실 거 같다.
엄마가 끓여주신 해장국 한 그릇을 먹고, 뭐 할지 빈둥거리다가, 제철 봄나물과 과일을 사러 가시는 엄마를 따라 나선다.
미나리, 오이, 당근, 무, 쪽파, 오렌지, 사과...
사고 보니, 제철 재료는 별로 없었네. 오늘 저녁은 향긋한 미나리 무침에, 잡채도 먹을 수 있겠다. 엄마랑 가까이 살면 받는 특혜이다.
아이가 하교까지 1시간이 조금 넘게 남았다. 3일전부터 하루에 글 한개 발행하기 미션을 달성하기 위해 도서관으로 향한다. 그 사이 엄마 심부름 하나 하고.
도서관으로 향하던 중 이렇게 도서관에 가면 빈둥거리기보다는 생산적인 하루가 될 거 같아서 괜히 어슬렁거리다가, 동네 공원으로 방향을 틀어본다.
5개의 벤치가 나란히 있는 가장 왼쪽 벤치에 앉아 랩탑을 꺼내 핫스팟을 연결하고 하루를 정리해본다. 오른쪽 벤치에 계셨던 어르신들은 이미 들어가시고, 막 하교한 10대 친구들이 그 자리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한다.
이제 아이 하교 함께 하러 가자.
죄책감 없이 빈둥거릴려고 했는데, 생산적인 하루를 보낸 거 같다.
내일은 어떻게 하루를 보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