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동거리는 삶에서 멈춰 선 자리
끊임없는 성장에 대한 갈망은 내 삶을 숨 돌릴 틈 없는 마라톤으로 만들었다. 주말 아침에는 그룹 코칭에 참여하기도 하고, 주중 저녁에는 독서 모임도 만들어 진행했다. 주변엔 참여하고 싶은 모임이나 세미나가 넘쳐났고, 하나라도 놓치면 뒤처질 거 같아, 체력이 되는 한 쫓아다녔다.
아이의 엄마로서, 나의 일상은 끊임없이 여러 역할 사이를 오가는 분주함으로 가득했다. 주말 아침엔 일을 잘하기 위한 공부를 하고, 이후엔 아이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인 목적지가 있는 어딘가에 가서 아이와 시간을 보낸다.
동생이 많은 큰 언니, 장애 아이에 대한 아빠의 무관심으로 인한 가족의 빈 자리를 채우는 큰 딸로, 많은 책임을 안고 있는 엄마의 페이스메이커로, 이 사회에서 보이지 않은 차별을 받았던 여성으로, 어린시절부터 어깨에는 책임감이라는 무게에 눌려 키도 작은 나는 참 동동거리며 살았다.
한 자리에 온전히 서 있지 못하고,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계속해서 팔다리를 바쁘게 움직여야만 가라앉지 않는 그런 삶이었다. 누구보다 부지런히, 쉼 없이 움직이며 살았지만 정작 내가 가고 싶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는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맞나보다. 동동거리며 살았던 그 습관이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다.
쉼 없는 노력이 성장이라는 착각 속에서, 내 안의 상처는 조용히 깊어져 갔다. 물론, 다양한 방면에서 성장 했다. 다만 그 사이 내 안에서는 상처가 쌓였고, 그 상처로 인해 돌아보면 후회하는 선택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쌓인 상처와 후회가 나를 멈춰 세운 경험이 있다. 입사 후 가장 짧게 다닌 작은 회사 이야기가 바로 그 중 하나이다.
내 직관을 무시한 대가는 고통스러운 8주간의 회사 생활로 돌아왔다. 이전에 했던 일과 제공하는 서비스가 비슷하여 지인이 추천했다. 편도 2시간 30분이 걸리는 거리를 매일같이 출퇴근 했다. 대표는 막연히 손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지만, 왜 필요한지, 조직 구조 등에 대한 고민이 크게 없었던 사람인 거 같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빈 부분을 메꿔가며 서비스와 조직에 대해 파악하고 있었다.
'쎄함은 과학이다'라고 했던가. 크고 작은 불편한 신호들이 느껴졌다. 한달이 조금 넘은 시점에 나를 포함한 몇몇 신규 입사자를 환영하는 전체 회식이 있었다. 그날 대표는 선을 넘는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직원들을 마치 자원이나 도구처럼 취급하는 비유를 사용하며, 회사에 들어온 사람들에 대한 냉소적인 관리 철학을 드러냈다. 마치 우리의 인격과 존엄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듯한 말투였다. 물론 속으로 혼자 그렇게 생각할 수는 있지만, 상대 앞에서 그걸 입 밖으로 꺼내면 안 되는 거다.
이런 상황이 되면 보통은 먼저 하는 일은 나를 의심하는 거다. 내가 민감한가? 그런 말들을 보통 하는 말인가? 판단이 서지 않아, 믿을만한 지인과 관련 이야기를 했다. 내가 민감한 건 아니었다. 선이 넘는 발언이 맞았다. 이후에도 여전히 나를 의심한다. 이런 환경에서도 버텨야 하는 건가? 너무 나약한가?
하루 5시간의 출퇴근 시간, 그리고 고민의 시간들은 눈 밑 다크써클을 점점 진하게 만들었다. 수습 기간 8주 만에 계속 이곳에서 일하는 게 회사한테도, 나한테도 긍정적이지 않다고 판단하여 그만뒀다. 내가 먼저 그만둔다고 말했지만, 충격은 내게도 컸다. 책임져야 할 생계에 대한 걱정과 나에게 맞는 회사였는지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급하게 내린 결정이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경험은 값진 깨달음의 씨앗이 되어 내 안에 뿌리내렸다.
첫째, 내 직관을 신뢰하는 법. '쎄함'은 과학이다. 불편한 신호가 느껴진다면, 그것은 단순한 민감함이 아니라 내 몸과 마음이 보내는 중요한 메시지일 수 있다.
둘째, 나의 선을 정하는 것의 중요성. 무엇이 나에게 중요한지, 어디까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인지 미리 정해두는 것이 후회를 줄이는 방법이다.
셋째, 책임감과 자기 돌봄 사이의 균형.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나를 부적절한 환경에 묶어두는 족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상처는 내게 선명한 기준과 경계를 세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기준이 생기니 힘들어도 결정을 하는데 있어 조금 더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아픔은 때로 우리를 멈추게 하여 진정한 자아를 만나게 한다. 그때의 충격과 자책은 깊은 상처로 남았지만, 그 아픔 덕분에 비로소 멈춰 서서 나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어떤 환경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지를 치열하게 고민하는 기회가 되었다.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은 고통스럽다. 여전히 힘들고 아프다. 하지만 그 과정을 통해 내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 감정을 믿어주는 법, 그리고 세상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나만의 페이스를 지키는 법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때의 배움은 여전히 나와 함께 한다. 여전히 동동거리며 살 때가 있지만, 이제는 가끔 멈춰 서서 내 안의 상처를 들여다볼 줄 안다. 그리고 그 상처가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귀 기울인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어떤 상처는 책임감이라는 이름으로, 어떤 상처는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다. 하지만 때로는 그 포장을 풀고, 상처 그 자체를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당신도 오늘,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볼 수 있기를. 그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첫걸음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