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씨 껍질을 까며
특별한 일 없이 여느 하루를 보내고, 가족이 모여 저녁 식사를 한다. 아이는 일주일 내내 먹었는데도, 질리지 않는지 이유는 모르지만 카레라는 단어와 매번 헷갈려하는 짜장밥 한 그릇을 뚝딱했다. 과일을 좋아하는 아이, 남편의 본가 가족들이 한번에 먹는 과일보다 아이 혼자 먹는 양이 더 많다. 오늘의 과일은 과일 가게에서 달다고 추천해준 블랙 라벨이 붙은 오렌지다. 오렌지는 새콤달큰, 상큼한 향내 풍기며 칼로 쓱쓱, 손으로 쓱쓱 벗겨내어 아이를 위해 내어주고는, 남편과 난, 동생네 가족이 즐겨 먹는 소금 뿌려 살짝 볶은 짭쪼름한 해바라기 씨 두 주먹 정도 꺼내온다.
단단한 껍질이 있는 해바라기 씨를 까기 위해 이로 깨물기엔 이가 성치 않을 거 같아서 깔 수 있는 가위를 찾아온다. 적당한 크기의 해바라기 씨를 집고는 가위 사이에 넣고, 힘을 준다. 아차차, 너무 많은 힘을 씨의 작은 부분에 줬나 보다. 까지려던 껍질은 안 벗겨지고, 조각만 깨진다. 서너 번 실패 후 이번엔 적당한 힘의 크기를 알아냈다. 씨에 따라 100% 성공은 아니지만, 힘 조절도 가능하고 대략 어느 지점에 힘을 줄지도 감각적으로 알게 되었다.
한 번에 해바라기 씨 껍질 까기 성공 횟수를 높이며 내심 자신감이 붙었다. 자연스럽게 남편과 소셜미디어에서 봤던 포스트를 가지고 대화를 이어간다.
"페이스북에서 봤는데, 카뱅 심규협 계좌 정보가 있는 이미지랑 후원했다는 포스트들이 꽤 있더라고. 빚이 많이 있다던데, 세상은 참 불공평한 것 같아. 앞장서서 광장에서 목소리를 냈던 작은 사람들이 모여 민주주의를 지켜냈지만, 그들에게 결국 남은 건 빚이라니."
"대규모 집회 한번 개최할 때마다 드는 비용은 평균 2억 이래."
"이게 뭘까. 민주주의는 지켜냈지만,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에게 남는 건 빚과 아픈 몸, 허탈한 마음뿐인 것 같은데. 이겼는데, 이긴 것 같지 않네. 씁쓸하다. 바꿀 힘이 있는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며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는 시민들이 모여서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런데 남는 건 빚뿐이라니. 어떻게 보면 사회의 약자에 해당하는 분들이 광장에는 더 많았잖아. 2030 여성분들처럼.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할까?"
우리는 자주 보편적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만의 방식으로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데 노력 중이다. 집회에 참여하는 것도 남편도, 나도, 아이도 상황이 되는 한 우리만의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한다.
당연히 그래야 할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으니까.
“이 광장을 채워주고 만들어주신 시민분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월급, 알바비, 티켓, 커피 한 잔, 밥 한 끼 아끼며 함께해주신 여러분들의 땀과 눈물 담긴 이야기를 절대 잊지 못할 것입니다.”
지난 5일 봄비 속에서 진행된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비상행동)의 18차 시민대행진 무대에 ‘카뱅 심규협 선생’이 모습을 나타냈다. 비상행동 공식 후원계좌인 ‘카카오뱅크 7942-09-53862 심규협’의 주인공인 그는 비상행동의 재정을 책임지는 사무국장으로, 이태원참사시민대책회의 공동상황실장을 지낸 시민사회 활동가다. 집회를 만들어온 이들에게 쑥스러움 가득한 얼굴로 일일이 감사 인사를 전한 그는 결국 “후원해달라”는 말 한마디를 차마 못 꺼내고 무대에서 내려왔다.
“후원해 달라”…‘카카오뱅크 심규협’은 그 한마디를 못 했다 한겨레 기사 중에서
해바라기 씨 껍질 까는 소리를 내며, 이런 불공평한 세상에 살고 있는 오늘이 힘들어서 잠시 대화를 쉬고 있는데, 아이가 냉장고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부스럭 부스럭 소리가 나더니, 뭔가를 들고 우리가 앉아 있던 식탁으로 다가온다. 아이의 손에는 엄마가 병원에 두 달 가까이 입원해 있는 동생 면회 시 가져다주려고 사다 놓으신 밀키스 한 병이 들려 있었다.
작은 기대를 하며 순수한 표정을 지으며, 조금은 자신감 없게 조용히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 병을 내보이며,
"우리 같이 한 잔 할까?"
그 순간 아이의 제안을 받아들이진 않았지만, 남편과 함께 크게 웃었다. 물론 아이가 마실 수 있는 것이었지만, 최근 탄산음료를 많이 마셔서 조금 제한할 요량으로 삼촌 갖다 줄 거라고 안 된다고 바로 거절했다.
"그럴 줄 알았어."
'아들아, 네 전략은 영악했지만, 스마트했다. 인정!'
씁쓸한 상황에서 아이 덕에 크게 웃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할까?" 라는 내 질문에
남편은
"역사는 그렇게 만들어졌어. 우리도 조금씩 나아가고 있어." 라며 긴 여운을 남기는 말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비록 현실은 힘들고 불공평하지만, 보편적 가치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노력이 모여 조금씩 나아가겠지. 우리가 경험한 광장이 그걸 보여준 거겠지.
우리 아이들은 우리보다 조금 더 똑똑하게 그들만의 방식으로 헤쳐나가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