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min read

React(즉각적 반응)와 Response(응답)

React(즉각적 반응)와 Response(응답)

낮 12시 35분, 병원 상담 예약시간이다.

글쓰기 위한 랩탑과 오늘까지 반납해야 할 책 한권을 넣은 가방을 메고, 병원으로 향한다. 아침의 산책 코스는 어제까지 정상의 높이가 100m인 줄 알았던 동네 뒷동산의 정상, (176m)까지 다녀왔다. 수십년간 이 동네에 살아도 정상에 다녀온 적이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어, 오늘은 정상을 한번 찍고자 계단을 힘들어하시는 엄마는 일부러 안 불렀다. 정상에서 이미 목표치인 10,000걸음을 넘겼다.

병원가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다. 아침 산책을 조금 무리하게 했나 싶기도 하다. 뭐든 적당히 하는게 중요하다고 하던데, 아침 산책의 적당히가 조금 지나쳤나보다.

"지난 주는 어떠셨어요?"

의사 선생님께서 물어보셨다.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긴장 상태의 나를 알아차릴 수 있었던 고용센터 심리 상담을 받은 일부터 아침에 있었던 부정적인 감정의 버튼이 눌렸던 이야기까지 하나씩 차분히 감정의 기복없이 풀어낸다.

남편의 표현에 의하면 감정적으로 한번씩 버튼이 눌려질때가 있다. 그 버튼이 눌려지는 순간에는 누가 옆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든,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고, 왜 이 일을 하는지 의미도 없어지고, 말 그대로 감정의 깔때기처럼 세상의 안 좋은 마음은 나한테 향하는거처럼 행동할때가 있다. 거기서 끝나면 다행인데, 그 감정을 가까운 사람, 남편과 가족들한테 여과없이 쏟아낸다. 쉽지 않지만, 힘을 내보겠다는 주변 사람들까지도 힘 빠지게 만드는 강력한 버튼이다.

힘이 안날땐 나가서 몸을 움직이라는 주변의 조언을 충실히 따른 날임에도 부정적 감정의 버튼도 같이 눌렸다. 산책을 한 이유 중 하나는 면역력 증가도 있지만, 남편과의 대화도 있었기에 살갑진 않지만, 재미있는 일들이 많은 않은 요즘이라 문장과 문장 사이에 공백의 시간도 꽤 있었지만,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이어가고 있었다.

가장의 무게가 힘들게 느껴진다고 남편에게 말했다. 그 무게를 덜고 싶다고. 남편은 육아로 인한 공백기가 커서 다시 일을 바로 하는게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다. 공백기가 길어 자신이 어떤 이야기를 하든 들어줄 상대가 없다고, 그런 측면에서 오히려 일을 했던 내가 부럽다고. 그 순간이었다. 부정적 감정의 버튼이 눌리게 된 트리였다.

남편의 '육아로 인한 공백기'가 있다는 말이 부담으로 느껴졌다.

'하아~ 또 내가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솔루션을 내야하는구나. 지금 나도 힘든데.'

세상의 모든 부정적 감정은 이제 내게로 향한다. 버튼이 눌리는 순간 쓸모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천하의 한심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의사 선생님과의 상담에서 어떤 문제에 직면을 하면, 문제를 정의하기보다는 React(즉각적 반응)을 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살기 위한, 생존의 방어 기제가 작동한 거일수도 있다.

아픈 동생, 무관심한 아빠, 그 모든 짐을 지고 있는 엄마, 엄마의 짐을 덜어드리는 게 큰딸로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어떤 문제가 생기면, 즉각적으로 솔루션을 찾아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나를 연습시켰다. 그러다보니, 무엇이 문제인지? 문제의 무게를 떠나, 항상 많은 문제들이 주변에 있었고, 늘 할일이 많았다.

남편의 의도는 지금은 우리가 힘들지만, 이 문제를 정의하고 하나씩 할 수 있는 것을 해서 풀어보자였다. 오히려 남편은 나름의 방식대로 자신 객관화를 해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이었는데, 살기 위해 방어 기제가 동작했다. 남편이 힘들다고 하니, 당장 해결해야 할 솔루션이 필요했고, 그 솔루션은 내가 어떤 방식으로든 움직이는 것! 으앗, 지금의 난 그렇게 움직일 힘이 없는데... 여기까지 이르니, 감정은 다 내려놓는 방식으로 살길을 정했다. 다~ 잘 안될거야라고.

의사 선생님은 감각이 들어오면, '멈춰서 살펴보는 시간'이 필요한 거 같다고 말씀해주셨다.

"신호등에 초록불이 켜졌다고, 바로 뛰어가지 마시고, 횡단 보도 한켠에 서서 이쪽 저쪽을 확인하며 차가 오는지, 살펴보는 시간을 충분히 가져보세요."

어떤 문제에 있어, 즉각적인 반응(React)을 하기 보다는,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감정도 들여다보고, 문제를 정의하는 데 있어 궁금한 게 있으면 알아 보는 시간을 가진 후 응답(Response)해보는 연습을 하는 거.

돌아보니, 감정 버튼이 눌렸을 때를 생각해보면, 배가 고팠다. 사과 반쪽, 식빵 반개만 먹고 돌아다녔으니, 정상 옆 절의 쉼터에서 직접 손으로 반죽한 밀가루를 얇게 뜬 수제비를 먹고 오지 않은게 유난히 후회된다.